선교지에서 살면서 드는 생각들이 참 많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도 많고요. 이런 것들을 정리하여 글로 남겨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알려 지지 않은 선교의 뒷 이야기들을 통해, 실수와 연약한 점들을 통해 교훈과 새로운 방향성들을 잡아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저의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조금씩 선교지에서 자녀 교육의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과 부딪치는 문제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미비하고 편협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생각을 글로 올려 봅니다. 실제 선교지에서의 자녀 교육은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며(저가 다 알지 못하는 영역들이 많이 있음) 힘든 것이랍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 왔습니다. 먼저, 크게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윌리암 캐리로부터 해안선 선교의 시대가 열려 졌습니다. 그리고 몇백년 후에는 허드슨 테일러로부터 시작된 내륙 선교의 시대가 열려 졌습니다. 지금은 도날드 맥가브란과 타운젠트로 인하여 시작된 종족 선교 시대입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에서 "미전도 종족"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변화가 없는 것은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선교사는 영적 영웅과 거인이기를 기대하고, 또 그 선교사를 통해 많은 사역의 결과들만 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 지 모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어 권능을 주셔서 둘씩 둘씩 사역지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돌아 와서 예수님께 신나게 사역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역에 수고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어린 배려와 말씀이 아니였을까요. 놀라운 사역에, 자신의 제자들이 사역의 아름다운 일들에 기쁘시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 사역에 지치고 수고한 제자들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것은 아닐런지요. 우리들은 그간 사역과 결과만을 보기를 기대하였지 지치고 낙심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선교의 시각이, 접근 방식이 변화되어 왔듯이,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이 이제는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교회에서 선교담당 목사님으로 선교 방문차 이나라 저나라 방문하시고는, X국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어느 선교사님을 한국에 돌아 가기 직전에 공항에서 잠간 시간적 여유가 있어 만날려고 친구를 불러 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사역하신 선교사님은 모처럼 친한 친구가 왔기에 그간 선교의 어려움들을 이 친구에게나 토로 할려고 약속 장소에 갔는데, 친구 목사님은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보다는 줄곧 사역과 새로운 일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셔서 결국 냉가슴 앓듯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를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선교사는 결코 영적 거인이 아닌 성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선교사들의 말 못할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풀어 볼까요. 여러분의 시각이 사역 이전에 선교사라는 사람에 대한 시각으로 전환되셨는지요? 그렇다면 이야기를 하나 시작해 볼까 합니다. 선교사들에게는 여러 가지 여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책으로도 선교 보고로도 들을 수 없는 슬픈 선교사들의 아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책으로도, 선교 보고로도 보고 들을 수 없을 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슬픈, 아픈 이야기들 보다는 사역의 멋진 열매들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들어 주고, 같이 아파해 주고, 그것에 대한 필요를 채워줄 자들이 없기에)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먼저, 자녀 교육이라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선교사 자녀들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며 어떻게 바라 보십니까? 부모가 선교사라고 자녀들도 선교사는 아닙니다. 선교사들은 결혼 전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선교에 대해 헌신하여 배우자를 만났을 수도, 아니면 결혼 후에 부부가 동일 하게 선교에 대해 헌신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던, 그들은 선교에 대해 헌신하고 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꾸준한 준비를 해 나갑니다. 선교지에 대한 정보도 모으고, 선교사로 나가기 위한 훈련도 받고, 그 외에도 필요한 자격을 위해 삶을 헌신하며 나갑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든 고향, 친구, 그리고 자신들을 사랑해준 이모, 삼촌, 고모들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부모들에 의해 이별을 경험하게 되어 집니다. 자신들은 이국 땅에 언어와 문화와 기후가 다른 곳에 부모들에 의해서 오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도 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 보다는 문화적응 능력이 뛰어 나다고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환경에 언어에 기후에 어른보다 훨씬 적응 능력이 뛰어 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스트레스와 문화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몇 해전 싱가폴에서 만난 한 선교사님 자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그 친구는 초등학생 3-5학년 정도 되었는데 선교지에 처음 와서 국제학교에 처음 나가서는 언어적인 장벽과 문화적인 장벽으로 잘 적응하지 못하고 6개월간 스트레스로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자신의 침대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껑충껑충 뛰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6개월 후에는 차츰 언어적(영어) 적응으로 친구들을 사귀고 환경에 적응해 간 것이죠. 이렇게 적응해 간 경우도 있는 반면 한 선교사님 자녀는 적응치 못한 경우 이야기입니다. 이 선교사님은 X국에서 모슬렘인들을 위해 사역을 하였습니다. 고독한 사역이고 힘든 사역이죠. 고독하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 모슬렘인들을 위한 사역이죠. 더군다나 이 선교사님 가정은 도심지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외지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결국 이 선교사님의 자녀는 자폐증에 걸려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선교사 자녀들은 지금 당장은 선교사들이 아닙니다. 물론 잠재적으로 미래에 좋은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많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결코 선교사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들에 대한 생각의 사각 지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선교의 열매나 사역의 결과 혹은 선교사들의 수고와 애씀에 대하여서는 기도하고 생각하였지만 수동적으로 선교지에 부모들을 따라 나온 어린 선교사 자녀들에 대하여서는 과연 깊은 생각을 가져 보았는지요? 선교사 자녀들의 필요는 무엇인가? 1. 먼저 무엇보다도 교육적인 혜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여 교육을 받아야 할 연령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들이 한국에 있다면 유아기부터 여러 학습교재로 한글과 그 외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영아원, 선교원, 유치원으로 단계적으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순차적으로 갈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선교지에 있으면 어린아이 한국어 교육과 그 외 교육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교육할 교재가 부족한 셈이죠. 한국의 좋은 학습지도, 그리고 읽어줄 동화책, 그림책 등도 손 쉽게 구입할 수가 없는 실정이죠. 또한 나이가 차감에 따라 영아원, 선교원, 유치원 식등으로 아이들 학교에 보내는 것도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선교사 자녀들이 대도시에 살게 된다면 국제 학교(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에 보내어 교육적인 혜택을 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도시에 살 때만 가능한 일이고, 또한 엄청난 재정적 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실로 외국의 국제 학교 초등학생 한 학기 등록금이 한국의 사립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금액이든지 그 이상일 때가 있습니다. 대도시에 산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재정적 부담인 셈이죠. 2. 둘째는 정서적 필요입니다. 우리 모두는 감정과 정서를 가진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정서가 풍부하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굉장히 좋아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노여워 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누군가 우리들의 생일에 장미 꽃다발을 가져다 주고, 근사한 식사를 차려주면서 생일 축하 한다고 노래를 불러주면 정말 우리들의 감정은 극에 달하지 않습니까? 자녀들 또한 마찬가지로 감정과 정서가 있답니다. 저의 아들은 이제 갓 두 살을 넘긴 조그마한 녀석인데 그 녀석을 으스러지도록 안아주면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있노라면 그 녀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아빠가 자기에게 해주는 사랑을 음미하면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답니다. 선교지에는 정말 벅벅한 생활이 되기가 쉽습니다. 부모님들의 사역에서의 바쁜 일정과 타 문화권 친구들이기에 그렇게 깊이 있게 적응하며 마음 깊은 곳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되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주변에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한 만한 공간이나 환경이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서양의 한 선교사가 시골에서 모슬렘 사역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도심지에 볼일이 있어서 기차로 몇 시간이고 와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이 선교사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같이 도심지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자녀가 시골에서부터 먹고 싶었던 피자를 사주었답니다. 한국에서는 전화 한 통화로 배달이 되는 피자이지만 오지에서 시골에서는 피자를 먹기 위해서 몇 시간을 나와야 한답니다. 저는 그 선교사님과 교제하면서 자녀의 정서적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 주려는 따뜻한 배려와 마음에 도전이 되었답니다. 3. 세번째는 영적인 필요입니다. 우리는 선교사 자녀라고 하면 다들 대단하리라고 생각하고 또 대단하기만을 기대하지는 않는지요. 한국에 있으면 주일학교 교육이다. 신앙 서적이다. 아이들 수련회다 많은 영적인 환경들과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사귀며 접할 수가 있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좋습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부모님들이 사역에 바쁘고, 자녀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더욱 기울여 주지 못한다면 자칫하면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이 멈추거나 퇴보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자녀들이 훨씬 많습니다. 다만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럼 이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먼저 한국 교회나 후원회에서 선교사 자녀 교육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땅끝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오지로 미전도 종족으로 떠나가는 선교사님들이 생기고 그들을 돕는 선교회와 후원회 교회들이 생겨 나듯이 말입니다. 먼저는, 선교사 자녀 교육의 어려움을 돌아 보며 생각하는 작업이 교회와 후원회에서 일어나야 하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제 이런 인식이 되어 졌다면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리라고 여겨 집니다. 저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봄으로 선교사 자녀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데 힌트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토대로 더 많은 참신한 생각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의 전략들이 나왔듯이 선교사들과 선교사들 자녀에 대한 수 많은 실질적인 도움의 방안들이 나온다면 좋겠습니다. 첫째, 선교사 자녀 입양 운동을 실행하여 본다면 어떨지? 지금 한국과 전세계적으로 선교의 운동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은 미전도 종족 입양 운동입니다. 이 운동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미전도 종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와 재정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무적인 일이지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자녀 입양에서 힌트를 따와서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소수 종족에 복음을 심고 교회가 서고 자립할 때까지 꾸준히 도와 주자는 운동입니다. 마치, 고아원 등에서 어린 아이들 입양하여 그 자녀들을 잘 입히고, 먹이고, 교육을 시켜주어 건강한 청년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돕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처럼요. 이처럼, 선교지로 나가 있는 선교사 자녀를 후원회에서 교회에서 아니면 개인이 입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가 건강하게 성년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교육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잘 자라도록 도와 주자는 것이지요. 입양이라고 할 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 선교사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계속해서 중보 기도해 주고, 또 정서적인 필요를 위해 한 달에 한번이라도 정기적으로 컴퓨터 E-MAIL이라도 보내어 주던지, 아니면 편지를 써준다면 얼마나 그 자녀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들의 옛날을 상기해 보십시다. 우리들이 어릴 때 국군 장병 아저씨들의 사기를 위해 위문 편지를 학교에서 단체로 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위문품을 모아 보내고, 그것이 군인들의 사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녀들이 필요한 한국 책들을 자신들의 자녀들이 다 읽고난 것이라도 깨끗하게 정리하여 배 편으로 보내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항공 편이 비싸다면 말입니다.) 저는 미전도 종족입양 운동처럼 선교사 자녀 입양운동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백지장도 맏들면 낫다'는 옛날 속담처럼 가뜩이나 사역에 고민하고 지쳐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사 자녀 교육은 또 다른 엄청난 숙제요 고민이랍니다. 선교사에게 선교사 자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은 반드시 있답니다. 둘째, 교육적 혜택을 위한 다각적인 방법을 찾아 봄이 어떨지? 외국의 선교사들은 자녀 교육의 재정적 부담감과 오지에서의 학교가 없는 문제를 가정학교(HOME SCHOOL)라는 과정으로 풀어 가고 있답니다. 이 가정 학교는 부모님이 선생이 되어 자기들의 자녀들을 일정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외국은 이 가정 학교 제도가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되어 있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더라도 집에서 교재로 교육을 시키더라도 문교부 인정이 되어서 대학교를 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이곳 현지에서도 외국인 선교사님 자녀들이 이 가정교육을 시키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실로 미국에서는 학교 폭력등이 심하여 자녀들을 가정 학교에서 공부시키는 경우가 늘어 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였습니다. 호주등은 땅이 광활하여 학교까지 가기가 먼 자녀들을 가정학교에서 교재로 공부 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자녀 교육에 대한 부담이 훨씬 덜 하답니다. 가정학교라는 대안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국은 가정학교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육부에서 인정되지도 않죠. 그러므로 재정적 어려움이 있거나. 오지에서 사역하시는 한국 선교사님께서 겪으시는 자녀 교육의 짐은 엄청나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이런 것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지고 한국의 교육부에 가정학교라던지 아니면 원거리 교육 시스템등을 개발 시켜 줄 것에 대한 다각적인 요청을 해 보는 것은 어떨지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리고 한국의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등이 이렇게 선교사로 나와 있는 자녀들에 대한 연계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연계하여 확장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힘써 본다면 어떨지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기독교 선생님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선교지에 나와서 선교사 자녀를 몇 달만이라도 가르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을 해본답니다. 아니면 기독교 선생님들이 교사 선교사로 선교지에 와서 선교사님 가정과 팀으로 사역하면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교육을 가지고 선교하는 즉, 선교사 자녀 교육과 더욱 확장된 개념으로는 지역 아이들까지도 가르치는 일들이 일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상은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들이고 위에 글들을 통하여 선교사 자녀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사랑이 기울여 진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과 축복이 임하길 소망합니다... 선교와 체력 우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많은 공부들을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면을 위해 힘쓰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접근의 용이성과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기술과 의술들을 익히기도 합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간과되기 쉬운 것이 체력을 위한 훈련입니다. 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한 한국인이 이런 글을 기고한 것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미국에 오면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현지 미국인들 보다 처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그 이유는 체력의 저하로 인하여 그렇다고 그분은 그의 책에 기술하여 놓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체력이 활발하게 발달하고 성장되는 중, 고교 시절에 공부에 매여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체력이 떨어진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잘 하다가 나중에는 막중한 공부에 힘들어 한다고 적어 놓은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공감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학창 생활이 기억나더군요. 입시가 다가올수록 체육, 음악, 미술 교육은 수학, 영어, 국어 등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대치되고 운동보다는 자율학습에 보충 수업이 우리들을 줄줄히 기다리고 있었던 시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도 너무 영적인 것에 매진하여 육체적인 부분들은 등한시 하지는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얼마전 티벳에서 오신 한 선교사님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분 가정이 태국에서 전세계 티벳사역자 회의가 있어서 태국에 오셔서 회의 참석 전에 저희 집에서 며칠을 머무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주로 2000M 이상에 거주하시면서 티벳 유목민들과 함께 돌아 다니면서 관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보통 해발 6000M 이상을 걸어서 올라 다니면서 유목민들과 같이 돌아 다니면서 유목민처럼 맨땅에서 자고, 더럽고 불결한 음식을 그대로 받아 먹으면서 생활하는 일을 하는 정말 거치고 힘든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다른 선교단체에서 오신 선교사님께서 자신도 실제 유목민들의 마을 깊이 들어가고 싶다고 하셔서 그분과 같이 고산 지역의 유목민들에게 올라 가셨는데 그 타 선교단체 선교사님께서 그만 고산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거의 숨을 쉴 수도, 손 발 아무 것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생명이 위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그분을 업고 그 고산지역에서 내려와서 그 선교사님의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달리는 말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보통 현지인들도 14일 걸리는 거리를 7일 만나 움직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께서 이렇게 강한 사역, 힘든 사역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강한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체육을 잘 하여 태권도, 권투, 마라톤 등을 하셨고 체육 특기생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보 국가 대표 선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분이 결혼하기 이전부터 티벳에 대한 마음을 주셨고 티벳 선교를 꿈꾸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강한 지역 힘든 지역을 위해 육체적 훈련도 아울러 시키신 것 같습니다. 선교지에는 체력은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도 선교지에 와서 육체의 건강과 중요성을 깊이 느꼈고, 좀더 청년때 운동으로 경건의 연습 못지 않게 육체의 연습을 할 것이라는 후회를 하였더랬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 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많은 선교사님들이 육체적 운동을 위해 체력의 증진을 위해 경건의 연습 못지 않게 선교지에서 훈련하시려고 노력하고 계시답니다. 선교와 영어 우리는 영어에 대한 깊은 부담감과 상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입시에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과목이 영어이고 또한 입사 시험, 승진 시험 등에 영어는 필수이고 그러므로 온 지방마다 영어 학원은 없는 곳이 없고 영어 교재 또한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교에 있어서도 영어는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선교를 위해 국제 비행기를 타고 나오는 순간부터 영어는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한국 비행기가 아닌 이상 모든 방송은 영어로 될 것이고 설령 한국 비행기라고 하더라도 선교지에 입국하기 위해서 서류 절차를 꾸며야 하는데 이 모든 서류가 영어로 되어집니다. 그리고 현지에 내려서 모든 수속은 영어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현지에서 바로 현지어가 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리고 언어 학원에 등록하여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도 모든 교재의 대부분은 영어로 편찬되어 있습니다. 현지어가 나오고 설명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 현지에서는 많은 외국 선교사님들도 만나게 될 것이고 언어 학원에서 같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더 깊이 대화하고 교제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고 그들이 한국말이나 초보자들이 현지어를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또한 선교지 현지에 대한 정보와 책들은 외국인 학자들이나 현지인들이 영어로 집필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좀더 많은 정보들을 알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도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영어를 가르침으로 젊은 대학생이나 학생사역들을 쉽게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시아권에서의 영어의 열풍은 각 나라마다 비슷하답니다. 그만큼 영어가 세계어이고 국제화된 것이죠. 그리고 국제 선교 단체에서 일하게 된다면 더더욱 영어를 많이 쓰겠죠. 국제 회의와 서신, 이메일, 모든 것이 공용어가 영어랍니다. 국제 회의 등에 참석하면 한국인의 장점과 영적인, 지적인 우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세계에 위축되고 선교의 축이 서양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 중의 하나가 영어의 한계의 벽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10/40선교, 미전도 종족 선교이기에 현지어만 능통하게 하면 된다고, 그러나 우리는 홀로 서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연합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만이 아닌 국제적 선교의 관계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공용어인 영어의 사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선교사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한국에 대한 깊은 조예와 이해가 있고, 또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장점을 드러내며 대등하게 국제 선교의 동반자로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면 좋겠다고요. 영어는 하나의 대화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토플, 토익 점수 잘 받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과 대등한 관계, 깊은 관계를 위해 한국어로 사용하듯이 외국인들과 대등한 관계, 깊은 관계를 위해 영어는 하나의 도구요 수단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듣고 하는 교육에 좀더 중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한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말레이시아 사람과 결혼하셔서 살고 계십니다. 이 한국 선교사님께서 첫눈에 말레이시아 자매에게 반하셨습니다. 그리고 청혼을 하셨습니다. 그때 이분은 영어 알파벳도 읽지 못하셨습니다. 이분은 그 말레이지아 자매님께서 "HOW OLD ARE YOU"(나이가 어떻게 되셔요?)라는 질문을 "HOW ARE YOU"(요즘 어떻게 지내셔요?)라고 하는 줄 알고 20분 정도 "I AM FINE AND YOU"(나는 좋습니다. 당신은 어떠세요?)라고 대답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무작정 반지 하나를 사가지고 그 말레이지아 자매님에게 이것은 약혼 반지라다 라고 주었답니다. 그말을 못하니 사전에 약혼이란는 단어를 찾아서 사전을 펼쳐 보여 주고 그리고 그 반지를 그 자매님에게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30분 정도 아직은 아니라고, 여러 변명으로 계속 영어로 이야기를 하였지만 영어를 전혀 못하셨던 이 선교사님은 묵묵히 그 자매님에게 30분간 그 반지를 내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자매님이 그 선교사님이 무안할까봐 30분 후에 반지를 받고 그후 몇 달 후 결혼을 하였는데 이제 아들도 낳고 결혼 생활 5년이 되었는데 대화가 소통된 것은 3년전부터라고 합니다. 처음 결혼하여서는 선교사님은 한영 사전으로 사모님은 영한 사전으로 서로 내밀면서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교사님은 정말 영어를 잘하십니다. 국제 회의에 가서도 한국인으로서 동등되게 세계인과 어깨를 겨루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사랑과 능력을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실제적인 영어 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이 세계선교와 서로 하나됨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