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가 생각해 본 것이 아니면 시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전우주적인 계시이지만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야 성경에서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영역으로 높여 올려지고 거기서 주께서 보시는 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요 3:3).
“현실적(Actual)”이란 뜻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실제적(Real)”이란 뜻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딘가에 있는 것입니다 (고후 4:18). 광신자들은 실제만 보고 현실을 무시합니다. 유물론자들은 현실만 보고 실제를 무시합니다. 이 땅을 걸으셨던 분 중에 가장 유일하고 완전한 제정신을 가지셨던 분은 (the only sane Being)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현실과 실제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현실 세계에 서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실제 세계에 먼저 서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고전 2:14).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그때야 우리는 실제 세계의 빛 가운데서 현실 세계를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가 현실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기도는 현실을 바꾸기 보다 현실을 보는 사람을 바꿉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현실과 실제를 함께 다루고 계십니다.
청결(Purity)한 삶을 사는 비결 (마 5:21-30)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 주님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고 주의 성령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청결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청결은 무엇을 옳게 하느냐의 질문이 아니라 마음을 옳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청결은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청결이라고 한다면 최선의 정의가 될 것입니다. 청결은 천진함이 아닙니다. 천진함은 어린아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의 천진함을 우리는 종종 청결함으로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심오하게 말한다면 어린아이는 청결한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의 천진함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장성한 어른들은 천진하기 보다는,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아도 청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청결하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청결은 갈등을 거친 결과입니다. 따라서 청결한 사람은 한번도 유혹과 시험을 받지 않은 자가 아니라, 악이 무엇인지 아는 자요, 악에게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았지만 악에게 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 악을 극복한 사람을 말합니다. 덕스러운 삶과 도덕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덕이 많고 도덕성이 뛰어나게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은 언제나 갈등을 이긴 결과이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적인 청결과 외적인 청결을 다 요구하십니다. 곧, 나의 현실적인 행동, 육체의 정결, 마음의 정결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평가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자신의 동료들과 비교하는 수준에서 그들보다 더 청결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바리새인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구속에 의하여 우리 안에 청결한 마음을 넣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아무 흠도 잡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이 구속의 기적인데 -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새로운 유전형질 (heredity), 곧 성령의 더럽혀지지 않은 형질을 주셔서 이 형질이 현실 속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마 15:19-20). 우리는, “나는 절대로 그러한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찔러 쪼개시는 예리하신 말씀보다는 우리 자신의 천진무구한 무지를 신뢰합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마음을 살핀 가운데 여전히 결백하다고 의식한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을 곧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내 안에 있는 무한한 악의 가능성을 보며 깜짝 놀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직까지 불량배가 아니었다면 그 이유는 겁쟁이거나 아니면 교양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자주 –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품위와 교양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 속의 악이 숨겨져 있을 뿐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졌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내가 나의 결백함이라는 도피처에 숨어 있는 한 나는 어리석은 자들의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마다 언제나 그들 나름대로 (어리석은)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마음이 끝이 없이 청결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만일 주께서 나에게 주님의 성향(disposition)을 주실 수 없다면 주님의 가르침은 약만 올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오신 이유가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함으로 나를 조롱하기 위하여 오셨다면 나는 주님을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만일 주께서 나에게 주님 자신의 거룩하신 성향을 주셨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청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엄격하시며 또한 가장 자비로우신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주님 자신을 주심으로 나도 주께 나 자신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나로부터 선행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악함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나의 악함을 받으시고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선함을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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