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불균형 (마 5:1-12)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자는 복이 있나니….” 이때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틀림없이 경악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저주로 여겨졌던 것을 복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는 모든 면에서의 물질적 번영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는 자는 정확하게 반대로 말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 하나님의 “폭약들” (마 5:1-10; 참조. 눅 6:20-26)

 

산상수훈을 처음 읽을 때는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하고 아름다우며 별로 깜짝 놀랄만한 주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이 특별한 관찰없이 우리의 무의식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 익숙해서 별 주의 없이 그 말씀들을 스쳐 보내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달콤하며 경건하고 놀랍도록 단순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은 무의식 영역 속에서 터질 수 있는 영적인 폭약들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 놓으시면 그때 우리는 그 말씀들이 얼마나 엄청난 내용들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단지 부드럽고 아름다운 교훈들일 뿐 우리가 사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성령의 폭약을 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의 상황이 이 폭약을 필요시 할 경우 영적인 폭탄처럼 터져서 우리의 모든 개념들을 터뜨리고 무너뜨리고 대변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은 진리가 우리 마음 속의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졌을 때 그 빛에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어떤 순종할 교훈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결코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만한 자가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성령께서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 말씀을 적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때까지는 (순종의) 시험에 놓여진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그 내용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이 중생에 의하여 우리 안에 침투할 수 있도록 우리가 허락하는가 안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중생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젖어들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은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그 가르침은 상황에 따라 의식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즉시 주님의 그 교훈을 순종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순종하게 되면 놀라운 영적 대변혁이 발생하게 되어 우리의 현실적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결심하기만 하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제자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순종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놀라운 정도로 매우 불편한데 그 이유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물을 보는 본성과 균형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균형 감각을 넣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서히 주님의 교훈에 맞게 행동하고 대화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오직 주님의 (거듭난) 제자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 경건의 동기 (마 5:11-12)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교훈을 주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 당신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산상수훈을 읽어보십시오. 당신은 그 동안 무시되었던 면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너무 뚜렷하기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지”입니까? 나는 실제로 역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과거의 죄악들을 지울 수 없으며 나는 내 기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 자신을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불가능한 그곳에서 나는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영적으로 거지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않고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의 처분에 대하여 온유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긍휼한 것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나 자신을 향하여 긍휼함을 느낍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단히 심하게 대하신다는 반사적인 생각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신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비방하는 것은 쉽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분명히 하나님을 향하여 청결한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그 역할이 잘 드러납니다.

 

산상수훈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절대로 가능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재창조하시며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으실 성령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경건의 동기를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바로 – 예수님과의 관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에도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동기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축복은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을 제일로 만들고 제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원칙과 다른 도덕적 가르침 사이에 불균형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모든 관심을 두지만 다른 도덕적 교사들은 인간의 뜻을 실현하는데 모든 관심을 둡니다.

 

원칙에 헌신하는 것과 인격에 헌신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인(Cause)을 선포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주님 자신을 향하여 인격적인 헌신을 선포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제자의 신분은 추상적인 개념에 충성하는데 근거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하여) 독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볼 때마다 당신의 모든 인격을 사로 잡아 주 예수님만을 향하여 뜨겁게 인격적으로 헌신하도록 불태우십니다. 당신은 더 이상 원인에 헌신하지 않으며, 원칙에 열성자도 아니고, 당신은 주 예수님께 사랑의 노예가 되어 헌신하게 됩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성령께서 그 사랑을 주시지 않으면 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감동받을 수 있고 주님을 존경할 수 있으며 숭상할 수 있어도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사랑을 부어주기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조, 롬 5:5).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인하여”라는 근거 위에 최고의 지복과 고결한 덕의 모든 축복을 두셨습니다. 양심을 인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신념 때문도 아니며, 또한 삶의 일반적인 재난 때문도 아니라, 오직 “나를 인하여” 받는 핍박을 의미합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2). 예수님께서는 “너희 자신의 괴팍함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여 멀리할 때 기뻐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너희를 “나로 인하여” 욕할 때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성도로서 처신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당신을 완전히 외톨이로 만들 것입니다. 당신은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하는 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람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 인격적으로 헌신한 사람은 구별됩니다. 교리나 신조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주님께 헌신한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한 순간만이라도 약간이라도 주님을 알아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희미하게 어렴풋하게, 숨겨지고 멀리 있을 지라도,

주님의 모든 뛰어남을 무시하지 않는다네.

다른 즐거움과 힘이 있던 없던

 

그렇지, 그 이후로 모든 사람 중에 담대히 서서

심각한 일이던 기쁜 일이던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들의 조롱에 벙어리되고 그들의 비웃음에 등을 돌리며

진심된 눈으로 자신있게 나아간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