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개념, 이상, 현실 (마 7:13-29)

 

두개의 문, 두개의 길 (마 7:13-14)

(1) 모든 고결한 것들은 어렵다

(2)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마 7:13-14)

(3)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강한 마음

 

가르치는 자를 시험해 보라 (마 7:15-20)

(1) 위선의 가능성 (마 7:15)

(2) 인내할 자리 (마 7:16)

(3) 선행의 원칙 (마 7:17-18)

(4) 인기의 힘 (마 7:19-20)

 

체면과 실체 (마 7:21-23)

(1) 사람들의 인정 (마 7:21)

(2) Remedy Mongers (마 7:22)

(3) 보상 측정 (마 7:23)

 

집을 세우는 두 사람 (마 7:24-29)

(1) 영적인 성 (Castles) (마 7:24)

(2) 혹독한 위기 (마 7:25)

(3) 최고의 재난 (마 7:26-27)

(4) 성경에 집중함 (마 7:28-29)

 

무엇에 대한 개념(idea)이란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를 말하며 더 이상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삶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삶은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현실적으로 삶의 사건들을 경험해 보면 당신은 책에서 알려준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념은 탐조등(searchlight)과 같아서 어떤 부분을 비쳐주지만 더 이상은 아닙니다. 반면 일광(daylight)은 탐조등이 보여준 것보다 수백수천의 것들을 더 보여줍니다. 개념은 뭔가에 대하여 제한을 두는 것이며 그리고 그 제한을 강요합니다.

 

이상이란 우리의 최상의 개념들을 구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을 단순히 이상으로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이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역사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였을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상이 더 온전할수록 그 사람의 갈등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비록 그 이상들을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할 지라도 나는 내 이상을 절대로 낮출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루어 낼 수 없는 이상을 가진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곧,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속에 뭔가를 넣어 주어 너의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지옥으로부터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삶들도 바꾸어냅니다.

  

두개의 문, 두개의 길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청중에게 친숙한 잠언과 격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잠언 및 격언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비유는 주님 당시에 아주 친숙한 내용입니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 영감을 추가하셔서 그 동안 오래 동안 참아오신 경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경고와 위협을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절대로 경고하지 않습니다. 경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영감 되어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술들입니다. 경고는 마태복음 23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말씀 중에 강한 빛을 드러내는 내용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차없이 결과들을 말하십니다.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이 내용에는 개인적인 앙갚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당신이 주님의 강력한 경고를 읽을 때 당신이 어떻게 주님을 그리게 되는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경고를 주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인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 13:15).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이 말씀의 숨은 저의를 잘 보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온유하셔서 궤사한 자의 길을 쉽지 않게 하셨습니다. 곧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그 길을 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자녀들을 위하여는 더욱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에 들어가려 한다면 그 사람은 곧 넓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에라스머스(Erasmus)는 말하길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리까지 가는 데는 칼로 도려내는 슬픔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들과 가슴이 찢어지는 사건들과 많은 깨달음을 지나야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말하길,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그 자리에 드디어 도착하였을 때 드디어 나는 내가 지났던 길들을 다시 지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실현해 보겠다는 길은 넓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의 인격적인 지식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요 14:6).

 

구원과 제자도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인격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을 것입니다 (고전 3: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망만 안겨줄 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선생으로만 오셨다면 그분은 이 땅에 안오시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불가능한 존재가 되라고 하면 그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라고 하고, 의무이상의 일들을 하라고 하며, 세상에는 관심을 완전히 끊으라고 하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헌신하라는 것등….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만 오셨다면 그는 헛된 이상을 인류에게 제시함으로 인류를 가장 조롱하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근본적이고 주된 이유는 우리를 중생 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주관하셨던 그 성향을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 사람에게 그 성향이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주께서 주신 모든 교훈들은 주님의 성향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이 만족스러울 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주시하십시오. 그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하여 절대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질문들은 절대로 독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이미 그들을 사로잡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논리적인 대답만을 원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3:23-24절에서, 어떤 경건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발이 바른 길에 서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처음에는 원래 질문을 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질문을 한 의도를 보시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얄팍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의식적인 필요들을 다루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 가운데 발생한 독창적인 질문을 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1) 모든 고결한 것들은 어렵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의 경건한 삶은 꿈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제자 훈련을 받을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결단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은 “선물”입니다. 결단이 필요한 때는 우리가 받은 새생명이 그리스도의 표준에 맞게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거룩케 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에게 성령을 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하려고 할 때에도 혼동이 오지만 또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데서 혼동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 가운데 걷게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빛 가운데 걸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능력과 생명을 넣어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과 능력이 현실 속에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제자의 고결한 삶이 어렵지만 영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제자의 삶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고 낙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일으켜 극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결한 생애가 되려면 반드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필요한 요구 사항들을 면제 시켜주는 일이 없습니다.  가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우리 인간의 인성 속에 형성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에 따라 자라가도록 새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이 부분에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인내로 당신의 영혼을 얻으십시오 (참조, 눅 21:19). 영혼이란 내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격적인 영으로서 이치를 따지고 생각하고 사물들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영혼을 얻기 위하여는 내 영혼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속의 엄청난 위대한 면들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속죄를 통하여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현실적 삶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 곧 나의 친구라”(요 15:14)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하여 당신의 삶을 내려 놓으라고 합니다. 당신의 생명을 실제로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당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내려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삶은 고결한 삶으로서 어려운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할 일은 “순종”입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속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해 놓으신 고결한 행위에 근거하여 우리가 행하기 때문입니다.

 

(2)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것을 최선을 다하여 밖으로 드러내길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구속에 관한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구속에 근거하여 현실적 삶 속에서 그 구속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 완성되었으며 우리가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주께서 내 안에 이루신 주님의 구원을 현실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제자로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는…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 제자들의 발을 …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3-5). 제자 훈련은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평범하고 천한 일들을 올바르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평범한 삶 가운데서 수건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제자 훈련이란 구속이 현실 경험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의 기적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제자를 시험하십니다. 생명의 문에서 우리에게 해당하는 쪽에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 좌우명은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나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의 제자로서 우리의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최선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 나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게 할 수 업습니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들어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그 구원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은 거룩한 과정이며 또한 어려운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히 2:10)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필요한 훈련들을 절대로 면제하여 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에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악한 일들을 다 해 보아라.” (역자 주 - 하나님의 자녀들의 훈련을 위하여 악역을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안일하고 호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라고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강한 식구들이 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그 은혜를 표현할 상황이 없으면 터져 버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 당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3)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강한 마음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절대로 거룩(hoyl)이라는 단어를 행복(happy)이라는 단어로 대치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거룩한 삶의 결과로서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교회 가운데 퍼져 나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행복하고 밝아야 한다”는 개념과 “언제나 웃읍시다”라는 운동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기질의 복음(the gospel of temperament)을 외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인의 삶의 근본을 행복을 위한 것으로 결정하는 순간 당신의 행복은 당신을 떠날 것입니다. 행복이란 원인이 아니라, 추구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는 한가지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눈을 협착하고 어려운 길에 두는 것이며 바로 이 길은 순결하고 거룩한 삶의 길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은 너무나 어려울 것 같지만 일단 우리가 그 멍에를 메면 모든 것이 쉬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에는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정도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는 때에 우리는 결국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기쁨이 우리의 목적이 아님에도 따라 옵니다. 우리의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동안 수백배의 복을 부으실 것입니다.

 

인생의 가파른 언덕 길에서 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따라서 근심하는 것은 죄악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사탄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들이 느끼기에 가파르다고 생각되는 일상적인 어려움들입니다. 특별히 음식과 옷과 집과 관련된 어려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막 4:19)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삶의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을 막았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우리 영혼은 너무나 약하여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죄에 유혹을 받았던 때보다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고 미안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 안에는 죄의 유혹을 저항하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염려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다음과 말하는 자들에게는 별로 해 줄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당신도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관계를 의지한다면 당신은 매번 이길 것입니다. 단지 영적인 결단이 필요할 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다른 길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의 삶에 이르는 것도 오직 같은 길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