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향과 행위 (마 5:21-22)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친밀한 예를 들고 계십니다. 만일 사람이 상식적인 판단을 무시하면 그는 마음의 법정(역자주 – 양심 또는 신앙 양심)으로 고소되어 끌려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그가 그 법정을 멸시하면 그는 최종 심판을 받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인 재판 집행을 예를 들면서 제자들의 성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곧, 나 자신도 닿을 수 없는 내 자신 안의 저 깊은 마음 속의 동기가 옳아야 합니다. – 이는 드러난 행위 뒤에 있는 성향이며 현실 가운데서 행동한 그 행동의 동기를 말합니다. 나는 행동으로는 결코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도 화를 내는 것이 불가능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나의 모든 의도들의 동기, 내 소망의 주요 동기가 옳아야 만이 옳은 행동이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서 시인은 자신 자신을 자신이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죄로부터의 구원은 (사람이) 의식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의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깊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속죄가 성령에 의하여 나에게 적용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의 기질이 주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도 전혀 흠이 없도록 나의 무의식적인 삶의 주요 동기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을 세련되게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잘못된 성향을 바로 고치기 위하여 뭔가를 추가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타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잘못된 성향을 절제하고 억압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성향을 주시사 행동의 주요 동기를 바꾸어 내십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오직 주께서 우리 안에 보내신 성령에 의하여 옳게 해석될 수 있으며 결코 연속적인 규율이나 법규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이 그 사람 속에 있던지 없던지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 내 안에 조성된다는 것은 주께서 나의 인성 속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생명과 부합하는 새사람을 입어야 하며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성향이 (나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역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향으로부터 인격을 만듭니다. 인격은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성향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성향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성향은 선물입니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성향에 따라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은 유전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의 성향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동기까지 온전하게 청결합니다. 만일 주님의 성향이 내 안에 조성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청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알기 시작합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7).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나의 유전 형질을 바꾸도록 맡긴다면 나는 하나님께 헌신하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 하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약의 행위 율법을 넘어서서 사람의 성향을 보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이 주께서 그분의 성령을 내 안에 넣어 주시지 않거나 나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면 그는 주의 말씀대로 어떻게 행할 수 있는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그는 분명한 성도이니 거룩한 성도인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입니까? 아니면 외식하는 사기꾼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진정함과 간절함을 믿고 외식하며 교만합니까? 우리는 너무나 간절하고 진실하여 오히려 그 간절함 때문에 장님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오는 완전하게 가난한 심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신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향을 바꾸셨는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연단하는 환경입니다. 연단하는 환경에 당신이 처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원한을 느끼는 대신에 당신의 성향이 너무나 놀랍게 바뀐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내 자신의 변화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켰음을 압니다. 만일 이러한 사건이 과거에 발생하였다면 나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독한 말을 하고 악의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 속에는 원래는 내게 없었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성향을 바꾸어내셨다는 증거는 나의 성향이 바뀌었다고 내가 나 자신을 설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우리를 시험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근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틀리지 않고 오히려 완벽하게 맞습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면 정말로 그 사람이 거듭났는지 철저하게 점검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관련된 모든 만남과 사건 속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고 말하고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