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포괄성 (마 7:12)

(1) 의에 대한 긍정적인 한계

(2) 합리성에 대한 격언

(3) 계시의 주요 의미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리스도인의 은혜는 전인격에 영향을 미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 12:30). 구원은 청결한 마음, 새롭게 된 심령, 하나님과 온전한 영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인격이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능력 가운데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혼과 영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매혹되어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백열 전등 램프가 이 의미를 잘 설명합니다. 만일 램프 덮개가 조금이라도 잘못 놓이면 백열 전능이 덮개에 가려 한줄기의 빛만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덮개가 정확하게 맞게 덮이면 빛이 환하게 비쳐서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이 주님께 사로 잡혀서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선하심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의에 대한 긍정적인 한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외부로 나타날 때 그 한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청결한 마음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새롭게 된 심령과 성령이 거주하시는 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몸의 지체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움에 한계를 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관한 분명한 지적 이해와 현실속에서 그 이해가 나타나는 결과 사이에 큰 분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그러한 분리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멋진 지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깨달음들이 현실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이해한 것을 말하다가 그 이해의 능력을 다 소모해 버리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도에 지나친 열심은 실체를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습니다. 열심이 결국 우리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에는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능력과 임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형식적인 대인 관계를 맺고 사는데 그 껍질을 벗겨 보면 아무 실제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것은 종종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소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혀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하는 것을 절제하고 대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멋지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의 은사가 오히려 그가 말한 데로 행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2) 합리성에 대한 격언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 주님께서 격언을 사용하신 것은 그 격언의 긍적적인 의미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소극적인 의미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남들이 당신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말과 매우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길 원합니까?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내게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면 이는 성령께서 당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너그러운 마음의 동기를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너그러운 마음의 동기를 가졌을 때 칭찬해 주시고 인정해 주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혹독하게 나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들에게 혹독한 판단을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으면 하네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은혜 안에서 우리가 자라난 영적 분량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광명한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찾아와서 말합니다. “너는 네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면 안되지.” 그러나 성령께서는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성령께서 당신을 교육하는 방법으로서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대로 성령께서는 당신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후 성령께서 말씀하시길, “자, 이제 가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 이 구절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현실 속에서의 윤리적인 행동의 기준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다른 사람에게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계속 당신 자신이 의로울 수 있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공의를 구하지만 공의 같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결코 너를 위하여 공의를 구하지 말고, 절대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특징은 불가능한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이며 따라서 주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하셔야 하고, 이를 위하여 주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주의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유전형질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3) 계시의 주요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율법들이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하여) 쓰여진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후 3:2). 성경은 어떤 이유에서든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에 의하여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우리의 신앙 고백과 일치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산상수훈 연구를 통하여 볼 때, 이는 마치 빛 세례를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자기 자신의 형질까지 깊게 적시는 듯한 그러한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내야 할 어떤 표준을 세웠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그분의 거룩하신 성령을 우리 안에 주셔서 성령께서 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하심으로 그 교훈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