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품(Character)과 행동(Conduct) - 마 7:1-12

 

그리스도인의 특징 (마 7:1-5)

(1)     비판하지 않는 성품 (마 7:1)

(2)     피할 수 없는 시험 (마 7:2)

(3)     피하고 싶은 남의 티를 말하는 자 (마 7:3-5)

 

그리스도인의 배려해야 할 것 (마 7:6-11)

(1)     차별의 필요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3)     분별의 필연성

 

그리스도인의 포괄성 (마 7:12)

(1)     의에 대한 긍정적인 한계

(2)     합리성에 대한 격언

(3)     계시의 주요 의미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 (벧후 1:5). 베드로는 위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공급하고 부지런하고 집중하라.” “공급하라”는 말은 성품과 관련된 것을 “더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품을 만듭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새로운 성향(disposition)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새로운 성품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적이던 초자연적이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성품은 사람의 성향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외부와 접촉하게 되면서 만들어집니다. 성품은 어떤 사람이 어떤 특별 분야에서 행동하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 가운데 계속 드러나는) 그 사람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에 의하여 평가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서술할 때 그 사람의 특이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계속적인 어떤 경향입니다. 성품은 계속 나타나는 것이지 가끔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은 계속 되풀이 되는 행동과 지속적인 행동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예외적이고 간헐적인 행동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것은 주의 백성들의 성품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는 것입니다 (호 6:4).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성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특징 (마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빼리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은 인간의 일반적인 기능 중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유모 감각도 있으며 균형 감각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며 어디서부터 착오가 생겼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주의 제자로서 판단하지 않는 기질을 개발하라고 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비판은 사랑이 변하여 썩은 사랑이 된 것입니다. 건강한 영적인 삶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판은 지적인 기능이지 도덕적인 기능이 아닙니다. 만일 비판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마침내 삶의 도덕적 기능은 파괴될 것이며 영력도 마비될 것입니다. 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감히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비판하는 순간에 우리가 비판하는 그 사람보다 더 우등한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판하는 사람은 그가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예술이나 음악을 비판하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완벽해야 합니다. 또한 비판하는 사람이 우월의식 가운데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그러한 자세를 가져서는 더욱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비판하면 우리는 잘못된 자리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끊임없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에 아무 이유없이 항상 비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한편 비판의 효과는 사람의 기를 죽이고 힘을 뺍니다. 비판은 그 효과에 있어서 치명적인데 사람의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 힘을 막습니다. 이러한 일은 결단코 성령의 일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만이 비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해 및 상처를 주지 않고도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째려보는 눈을 하고 남들이 잘못하는 것만 찾는 그러한 기질의 사람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비판은 공동체를 마비시키는데 이는 바로 비판이 성령에게 속하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비판은 남들보다 우월의식을 갖는 교만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결코 사람들을 멀리 떠나서는 안될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비판하지 않는 기질을 소유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들을 조심하십시오.

 

예수님의 권면은 비판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신 성령의 특징은 잘못된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이상한 것입니다. 성령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여주시는 것은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지 비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만일 성령께서 다른 사람의 죄성과 불신을 보여주시면 성령의 목적은 우리가 그들을 보며 “이런, 하나님께 감사도 하지. 나는 저 사람만큼 악하지는 않다”라는 악한 즐거움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성과 불신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 없이는) 분별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분별력은 우리의 책임을 엄청나게 많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분별력만 소유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옳게 만들어 놓으실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요일 5:16).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남을 비판할 여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분변할 수 있는 능력과 차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 분변과 차별의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영적인 삶의 뿌리를 점검하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남을 비판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우리의 전 생애가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십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 강이 마르게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합니다. “주님, 제가 유용한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유용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8).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주님의 격언을 우리 영혼 깊숙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자라나게 하는가를 발견할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왜? 우리는 언제나 비판합니다. 보통 그리스도인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모습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 아닙니다. 비판하는 기질은 우리 주님의 모든 가르침에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말씀하실 때, 자신을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당신이 판단하는 마음을 갖는 때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판은 당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며 혼을 내 주려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당신을 잔인하게 만들며 당신이 더 우월한 사람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합니다. 따라서 계속 비판하는 자세를 유지함으로 성도의 성품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정결한 근원을 주시는 것이며 그 이후부터 그 사람 안에는 교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나는 내 안에 잠재되어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분변한 이후부터 내가 실망하게 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를 제거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기질이 비판하지 않는 기질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이유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비판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배우기 혹독한 교훈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사정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후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행위 규례를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2) 피할 수 없는 시험(Test)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우연한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 영원한 법칙입니다 (참조, 시 18:25-26). 당신이 사용한 헤아림이 다시 돌아와 당신을 헤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 법칙을 비판과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결점을 간교하게 발견해 왔다면 당신도 정확하게 그러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똑 같은 방법으로 판단합니다. “나는 저 사람이 나를 비판해 왔음을 완벽하게 확신합니다”라고 하며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 당신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삶은 당신이 지불한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비판한 사람에게 반드시 보응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적인 법에 의하여 당신은 분명히 보응을 받게 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선행과 악행에도 같은 법이 적용됩니다. 만일 당신이 자비로우면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비판하면 당신도 그렇게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보응과 보복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삶의 원칙은 행한 대로 받는 보응입니다. 주께서는 그 어떠한 보복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2:1절을 보면 이 원칙에 여전히 분명하게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내용을 내가 행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잘못된 것을 볼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잘못을 당신 안에서도 발견하십니다. 내가 당신을 비판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2:1).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보시지 않고 가능성을 보십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성경의 진술을 믿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위선과 사기와 거짓을 보게 되는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다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육에 속한 의심(carnal suspicion)을 (성령께서 주신) 성령의 책망으로 오해한다는 점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책망할 때는 회심을 위한 것으로서 (성령의 책망을 받은) 그 사람이 변화되어 다른 특징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권리가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틀리다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 일은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성도의 가장 위대한 특징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 자신도 (우리가 비판하는) 이러한 여러가지 죄악들로 가득차게 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비판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비판을 하면 당신도 반드시 비판 받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을 판단한 것같이 판단하여 주소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함 같이 우리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구속을 통하여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3) 피하고 싶은 남의 티를 말하는 자 (마 7:3-5)

 

보통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밀을 말하는 몰염치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춰내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사탄의 영으로 차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비판할 만한 것들을 찾아 다니느라 째려보는 눈을 하고 다닙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할 만큼 간교합니다. 이러한 티를 발견하면 우리는 우월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 사람보다 자신이 훨씬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어디서 발견합니까? 주 예수님께서 발견합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을 책망할 때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은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빛처럼 그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설교자가 항상 당신을 비판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닙니다. 설교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 당신 안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간섭하며 탓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없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을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혹독하게 그러한 사람을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란 뜻은 문자적으로 “쇼를 하는 자” (playactor)입니다. 그 사람의 진심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위선자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의식적으로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흠을 발견하였을 때 그 사실을 말해주면서 매우 진실한 척 하지만, 주님께서는 실제로는 우리가 속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 깊은 곳까지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속일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형제의 눈의 티를 본다면 이는 사실 내 안에 들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내용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하여 나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제거하도록 한다면 (우리의 눈은 밝히 보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당신을 위하여도 쉽게 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들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신은 기껏해야 쪼개진 나무 조각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에게 주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로 인하여 너무나 놀라게 되고 동시에 우리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단지 조금 망가져있네요. 저는 너무나 많이 망가져있어서, 가장 못됐고 편견도 많았으며 이기적이었고 자기 주장만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켰으니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던 그 누구에게던 결코 실망할 수가 없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가장 무서운 영적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한편 주님의 말씀은 다니엘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왜 자신의 머리를 조아리고 수욕을 감당하는 가운데 기도하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단 9:16). 지금 이 부름은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