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육신된 지혜와 개인적인 이치 (마 5:43-6:34)

 

삶에 대한 신적 법칙 (마 5:43-48)

(1) 권면 (마 5:43-44)

(2) 하늘 아버지의 본 (마 5:45)

(3) 표현 (마 5:46-48)

 

종교에 관한 신적 영역 (마 6:1-18)

(1) 박애주의 (마 6:1-4)

(2) 기도 (마 6:5-15)

(3) 금식 (마 6:16-18)

 

마음에 관한 신적 이치 (마 6:19-24)

(1) 저축에 관한 교훈 (마 6:19-21)

(2) 구분(Division)에 대한 교훈 (마 6:22-23)

(3) 분리(Detachment)에 대한 교훈 (마 6:24)

 

믿음에 관한 신적 이치들 (마 6:25-34)

(1) 염려하지 않도록 주의함 (마 6:25)

(2) 이치에 맞지 않음을 주의함 (마 6:26-29)

(3) 불신을 주의함 (마 6:30-32)

(4) 집중된 성결 (마 6:33-34)

  

우리는 두 세계에서 삽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상식의 세계와 믿음으로 접하는 계시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확하게 이 두 세계에 잘 맞는데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입니다. 만일 우리가 상식의 세계만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세계를 버리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는 언제나 계시의 세계로부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계시의 세계에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세계에 들어가기까지는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두 세계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이는 주님의 유전 형질이신 성령을 받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의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은 지적 호기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지적 호기심은 배제되고 의지적인 순종이 가장 중요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 알리라” (요 7:17).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밀들을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을 장려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우주를 탐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주셨으며 우리는 한결같이 이 일을 할 때 지적 호기심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영역에 들어가면 아무리 많은 연구 및 호기심이 전혀 효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일반적 상식 기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따져볼 수 있지만 우리의 감각으로는 그분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식은 이 보이는 세계 외에는 다른 세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하시고 그곳으로부터 말씀하시는 그 다른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접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하여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해는 확장되고 이 두 세계가 서서히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결코 일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야만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받아야만 구속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를 창설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며 문명을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실제”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거룩한 것도 세속적인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실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제자들을 주님처럼 만드십니다.

  

삶에 관한 신적 법칙 (마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조건에 적용해야 하는 신적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하는 내용을 언급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볼 때 이 구절들은 영적으로 따라야 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야 하며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처하는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는지 가르치실 것입니다.

 

(1) 권면 (마 5:43-44)

 

여기서 우리 주님의 권면은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적인 사랑의 놀라움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착한 사람 뿐만 아니라 나쁜 사람에게도 보여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탕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우리가 매우 적개심을 갖게 되는 큰 아들에게도 그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당신의 자연스러운 애착에 따라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자연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맘에 드는데 다른 사람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잘 지내는데 다른 사람과는 사이가 멀어집니다. 절대로 이런 식의 좋고 싫음이 당신의 신앙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 1:7).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친교는 우리의 자연적인 애착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2) 하늘 아버지의 본

 

우리 주님께서는 삶에 대한 신적 법칙을 말씀하신 후에 그 법칙에 완전하게 어울리는 삶의 본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본으로 주님께서 추천하시는 분은 착한 사람도 아니며 훌륭한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운 이 내용을 충분하게 소화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로 본이 되는 사람을 따르라. 또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있으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를 잘 살펴보고 그를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모든 사회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 주님을 온전히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지 당신에게 최고로 본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신이 읽어본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성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권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부모들의 사랑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되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관심에 한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우리도 완전하다는 사실을 현실의 삶 속에서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처음에는 그 뜻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말씀이 아주 아름답고 경건하고 따스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래지 않아 그 사람의 이 말씀에 대하여 가졌던 모든 선입견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내는 폭탄이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깨닫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이 원수가 없을 때는 아주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생기면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눅 6:28). 아무도 당신을 저주하지 않으면 쉽습니다. 그러나 누가 당신을 저주하면 그 사람을 복을 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 28). 우리에게 원수가 없을 때, 우리를 저주하는 자도 없고 핍박하는 자도 없을 때는 이 모든 것을 행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를 비방하며 괴롭히고 나아가 조직적으로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할 때, 그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읽게 되면 당신은 순종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내면을 재창조하시지 않으시면 주님의 가르치심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우롱이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단지 이상일 뿐입니다! 산상수훈이 사람을 절망으로 찢어놓을 때 – 이는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의도한 바이신데 – 곧,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으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수 없고 산상수훈에서 계시된 그 기준의 근처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의 성향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성향을 받게 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심술궂게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대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절대로 애매하게 말하지 않고 항상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인류를 사랑하는 것과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선대하라고 하시지 그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를 모욕하는 자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지 선대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명령들은 자연인들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주신 이 순서를 바꿀 경우 이 명령들은 억지로 지켜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칙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명령을 절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원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표현 (마 5:46-48)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착한 일을 함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음으로 표현됩니다. 착한 일 또는 옳은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께서 쓰신 글로 도장이 찍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현되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삶 속에서입니다. 우리가 중생하였다는 증거는 우리가 아주 시끄럽고 복잡한 일들을 접하게 될 때 그 모든 중심에서 조금도 요동없이 훌륭하게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능력은 전에는 우리에게 없었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48절은 20절을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48절의 완전함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향을 참조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 미래형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과 같이 너는 완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그 완전함을 하나님께서 나타내도록 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시면 우리는 훌륭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성을 통하여 신적인 특징들을 드러내게 됩니다. 거룩에는 오직 단 한가지 종류의 거룩이 있습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본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이러한 표준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해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 이 표준이란 하나님께서 조금도 흠을 잡으실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의 청결의 표준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신적 규칙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표준으로 이끌어갑니다. 주님의 요청은 이러한 놀라운 주의 말씀에 의하여 평가되어 합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깨어진 질그릇 중에 가장 못난 것을 취하여 거룩한 도구로 삼으십니다. 마치 당신과 나를 취하여 신령한 생명을 넣으시고 우리로 그 생명에 가장 잘 어울리도록 만드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주님의 교훈을 알려주고 그 교훈에 맞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그 교훈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환경 가운데서 주의 교훈을 적용할 수 있도록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완전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 사람들이 나를 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만일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정말로 착한 사람이다!”라고 하면 나는 어디에선가 주를 향하여 배반해 왔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관심이 남들에게 착하게 보이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는 곧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메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 같으며” (사 64:6)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될 때 예수님의 불꽃 같은 그 거룩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첫째도 예수님, 둘째도 예수님, 셋째도 예수님만 바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매우 착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하셨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영적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가까이 하십시오.

 

마태복음 5:30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주님은 “불구가 된”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48절에서는 주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불구자란 뜻입니까? 주께서 오른손이 잘리고 오른분이 뽑혔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30절에서 시작하신 그림을 48절에서 마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반적인 영적인 삶을 포함합니다. 48절에서 주님은 거룩으로 꽉 찬 삶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거룩은 나의 성향과 주님의 율법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이것 저것을 잘라내야 하는) “불구자의 삶”으로 시작합니다. 만일 이러한 모습이 없다면 그가 성령을 받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소위 “미쳤다”고 말해야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구”의 영혼으로 하나님과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시계추가 이끝에서 저끝으로 움직임같이 (처음 우리의 신앙의 삶은)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극단적인 반대편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광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적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은지요? 우리 평생이 주님께 아주 쓸모없고 형편없는 삶이 되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백배 낫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 지라도 우리의 영적인 삶을 불구가 되게 하고 영적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오른손이던 오른눈이던 다 잘라낼 의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주께서는 주님께 순종하는 모든 자들의 삶을 온전한 분량까지 자라나게 하십니다.

 

맨 처음에 (빛의) 생명으로 들어갈 때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셔야 하며 “미치는 지경”까지 가야 합니다. 이때 위험은 “열광적인 상태”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열광적인 상태가 정도를 벗어나면 영적인 정신 병자가 됩니다. 은혜 가운데 시작된 믿음의 삶은 옳고 그른 것에서 언제나 절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맹신하는 곳에서 주님의 빛으로 인도하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맹신을 고집하는 가운데 영적인 정신 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확신의 빛 가운데 걷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가운데 걷는 것은 훨씬 웅장하고 순결하고 강렬한 빛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참을성이 없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제재와 구별과 잘라내는 역사가 발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주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가락 관절들을 살짝 부러뜨리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영혼을 내게 맡기라.” 언제나 당신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빛과 자신의 빛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불안정하여 맹신하는 자리로 가는 것 같지만 곧 서서히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균형된 자리로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실 때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갈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