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에 대한 대처 (마 5:38-4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1) 모욕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청결한 삶을 살고 훈련을 해야 할 뿐 아니라 핍박을 대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과거 중동에서는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가장 심한 모욕적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픽티터스(Epictetus)라는 로마 노예는 뺨을 맞는 것보다 맞아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예수님의 심부름꾼이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을 위하여 다툴 시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모욕은 성도에게 있어서 주 예수님의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충격을 주어야 하는 곳에서 충격을 주며 또한 매번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의 오른편 뺨을 치면 신경을 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자로서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정신 병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되받아 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볼 때는 이는 당신이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으로 볼 때는 이는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외부적으로 볼 때는 둘 다 똑같이 보입니다. 위선자와 성도는 사람들의 눈에는 같아 보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멸시 받을 만한 온유함을 보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엄청난 모욕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의 아들의 힘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불가능한 것을 하십시오. 당신이 그 일을 하자마자 당신은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만 적용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그 말씀들을 우리를 위하여 해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조언은, 당신이 개인적인 모욕을 받게 되면 그것 때문에 분노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비결은 인격적인 주님께 인격적인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모순된다”는 똑 같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번도 모순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 일관성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언제나 변화하며 자라납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벽돌로 만든 벽도 일관성이 있는데 그 일관성은 딱딱하게 굳어진 일관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만 일관성이 있습니다. 딱딱하고 고정된 신조에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신조에 자신을 헌신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전에 그들의 편견을 다 폭파시켜야 합니다. “새로운 애착의 폭발적인 힘”이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의 실체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자신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수훈대로 살수 있으려면 먼저 중생의 기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산상수훈대로 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 속으로 주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조성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산상수훈대로 살아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7; 비교 눅 1:35).

  

(2) 강탈 (마 5:40)

 

이 내용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내용이지만 우리 주님 당시에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소를 당하여 겉옷?속옷을 다 빼앗기더라도 밤에 잠을 자기 위하여 옷을 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떠한 일들을 당하게 될 것인가를 지적하기 위해 이 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섬기는 동안 만일 사람을 당신으로부터 뭔가를 강탈하려고 하면 그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고 당신은 계속 당신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싸울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당신의 주장을 하지 마십시오. 산상수훈은 “네 의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의무가 아닌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역자 주 – 여기서 오스왈드께서 “네 의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땅히 싸우는 것을 의미하며 “네 의무가 아닌 것”은 주께서 맡기신 일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악과 싸우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3) 폭군 (마 5:41-42)

 

로마 관할에서는 로마 군사들이 아무나 붙들고 억지로 5리를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로마 군사가 그를 붙들어 강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네 제자이면 너희는 언제나 10리를 가게 될 것이요, 너희의 의무보다 언제나 더 많은 수고들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 이런.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오해하고 나에 대하여 나쁜 말만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10리를 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10리를 가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 섭섭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요, 그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10리를 가면 이는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권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권리입니다. 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권리를 포기하고) 내 자신을 아프게 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골 1:24).

 

42절은 신학적으로 까다로운 내용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내용은 정신 병자 또는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만 해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우리가 완전하게 알게 되면 주께서 우리를 새로 창조하지 않으시면 도무지 순종하기가 분명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불가능한 것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절망하게 하신 후에 주님으로부터 그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령을 나타낼 수 있는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킵니다. 현대의 박애주의는 가난한 사람들도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풉니다. 또는 그들이 가난한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자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동기로 자선을 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명하시기 때문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자선을 해야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이치를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이치를 신뢰하여 우리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말아야 할 수백가지 이유들을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이치는 주님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지성인들이 어떻게 따집니까? “이 사람들이 나의 자선을 받을 자격이 되나요?”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누리는 복들을 누릴 자격이 되느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왜 우리는 언제나 이 말씀을 “돈”으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분명하게 돈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돈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돈이 생각난다는 뜻은 우리 마음이 돈에 있다는 뜻입니다. ( 베드로는 없는 자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 그러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자선이 충동이나 성격 때문에 되어지는 것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길 원하십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주라고 했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교묘하게 바꾸고 타협하는 이유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완전한 섭리를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우리의 상식을 보좌에 앉히고 말합니다. “말로 안돼. 구하는 자마다 다 주면 모든 거지가 언제나 우리 집 앞에 있게 될텐데….” 그러나 순종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은 자신에게 찾아와 구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강권에 의하여 구하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재하시는 성령이 없이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 교훈을 문자적으로 지켜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도록 하면 우리는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섭리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