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포자의 마음을 가질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지식은 성령을 받게 될 사람들이 얻을 수 있습니다. (참조, 눅 11:13, 요 20:22, 행 19:2).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변함없는 방법은 신자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주님의 원칙들을 그 신자가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십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우리 주님을 구세주보다는 교사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교사로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면 먼저 주님을 구세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절망만 안겨주는 이상적인 의미 밖에 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결점과 부패한 마음과 악한 본성으로 가득한 우리 인간들에게 마음이 순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망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룰 수도 없는 이상을 우리에게 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이상이 없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교사이기만 하시다면, 그분이 하신 일이란 우리가 근처도 갈 수 없는 기준을 세워 놓고 우리를 약올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거듭남으로 인하여 먼저 우리가 주님을 구세주로 알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만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치신 대로 주께서는 우리를 “만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실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게는 절망만 안겨 줍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의도한 바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절망에 이를 때에야 그 즉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 (역자주: 거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주께 손을 벌리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이 천국의 첫째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만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만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버려 두십니다. 결국 어떤 역경을 만나 우리의 무지로 인하여 목이 부러질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며 주께 손을 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소유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결단들이 아니라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시작도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에 입문하는 입구입니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자신의 가난함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전방에 도착한 것입니다.